한국전쟁 중 헤어진 조류학자 아빠와 아들, 철새에 단 인식표로 서로의 생사 확인하다 둘 다 세상 떠났다

By 안 인규

일제강점기 시대, 광복 이전까지 조선인 조류학자는 단 한 명이었다. 1888년생 원홍구 교수다.

평안도에서 태어난 조선 유일 조류학자 원홍구 교수는 우리말로 된 조류 명칭을 정리한 인물로, 줄곧 고향인 평안도와 개성을 기반으로 거주하며 활동했다.

아들 또한 개성에서 태어났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어릴 적부터 를 찾아 산과 들을 노니곤 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에 휘말린 부자는 그대로 헤어져 서로 연락이 두절됐다.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전쟁 중 남쪽으로 내려온 아들은 경희대학교 생물학과에 진학해 아버지의 뒤를 따라 조류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15년이 지났다.

원홍구 교수 / 통일부 블로그 캡처

1965년 일본의 조류연구소에 북한에서 온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러시아를 경유해 온 편지였다.

편지를 보낸 이는 북한 평양에서 여전히 조류학자로 활동하고 있던 원홍구 교수였다.

“평양의 공원에서 북방쇠찌르레기 한 마리가 발견됐습니다. 녀석은 일본에서 제작한 조류 인식표를 차고 있더군요.

그런데 북방쇠찌르레기는 철새이긴 해도 한반도에서만 살지,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본의 인식표를 차고 있어서 매우 놀랐습니다”

일본 조류연구소는 일본이 한국에 조류 인식표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류 인식표는 국내에서 제작되지 않아 한국은 일본에서 만든 인식표를 사용했다.

원병오 박사 / 통일부 블로그 캡처

확인 결과, 일본에서 제작한 조류 인식표를 제공받아 찌르레기 새에 채운 건 그보다 2년 전인 1963년 서울에서였다.

채운 사람은 우리나라 조류학계의 선구자격인 원병오 박사. 원홍구 교수의 아들이었다.

1963년 아들 원병오 박사는 철새의 이동 경로를 조사할 목적으로 북방쇠찌르레기 다리에 인식표를 달아 날려 보냈다. 2년 뒤 그 새가 아버지 원홍구 교수의 눈에 띈 것.

아버지와 아들이 한평생을 바친 공통 주제, 새가 은혜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남녘에서 날아가 북녘으로 향해 아버지와 아들을 이어주었다.

그때까지 아들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던 아버지는 그제야 아들이 자신의 뒤를 따라 조류학자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들도 폴란드의 조류학자를 통해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연합뉴스

이후 이들 부자(父子)는 전 세계 조류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몰래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북에 있는 아버지는 제대로 된 편지를 보낼 수 없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주 간접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북한 선전 유인물을 통해서였다. 당시 유인물에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과 같이 잡던 새 이야기 등이 담겨 있었다.

아들 원병오 박사는 한 인터뷰에서 비록 그것이 북한 체제 선전 유인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아버지의 정을 듬뿍 느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새가 물어다 준 서로의 안부에 위안을 삼으며 남은 평생을 보냈다.

원홍구 교수는 1970년, 원병오 박사는 2020년 작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