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BTS, 오늘날 한류의 원조, 엄청난 스타성의 소유자…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별명들일까.
조선 시대, 개성의 가난한 양반집에서 태어난 어느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가족은 황해도 석봉산 기슭에 살았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뒤 떡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리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에게서는 천자문과 글씨를 배운다.
글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어찌나 가난했던지 종이 살 돈이 없어 집 밖에서는 돌다리에 글씨를 쓰고, 집에서는 항아리에 맹물로 글씨 연습을 했다는 소년의 기록이 남아있다.
소년이 청년으로 자라고, 25살이 되던 해, 과거 시험에 합격한 청년은 주요 문서와 외교 문서 등 국가 공문서를 쓰는 관리직인 승정원의 사자관으로 임명된다.
당시 조선은 중국의 서체를 모방하고 지나치게 의존하는 풍조였다. 청년은 이를 깨뜨리고 조선만의 반듯하고 정갈한, 독특하고 강건한 서풍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오히려 중국에 자신의 글씨체를 역수출하기 시작했다.
사자관으로 명나라에 여러 차례 출장을 가면서 이름을 날리게 되는데, 청년이 당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청년의 글씨를 구하기 위한 중국인들의 줄이 길게 섰다.
말 그대로 한류 열풍 그 자체, 그야말로 한류스타의 탄생이었다.
그 스타성을 입증하는 사건도 있다.
야사에 따르면, 중국 명나라 사신인 주지번이 어느 날 연회를 열고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문제 하나를 냈다.
“내 글자 100개를 줄 터이니 이 100자로 운을 맞추어 하룻밤 안에 시를 써 보일 이가 과연 조선에 있는가”
당대 조선 최고의 시인이었던 차천로가 이에 응수하며 조건 세 가지를 내걸었다.
“첫째, 술 한 동이를 주시오. 둘째, 글을 쓸 병풍을 주시오. 셋째, 내가 부르면 이 청년이 글을 쓸 것이오”
차천로는 술 한 동이를 마시면서 즉석에서 시를 읊었다. 청년은 이를 병풍에 일필휘지로 적어 내려갔다.
청년의 글씨를 본 주지번은 감탄한 나머지 쥐고 있던 부채를 자기도 모르게 부러뜨렸다고 전해진다.
명나라의 대문호였던 왕세정 또한 “그의 글씨는 성난 사자가 돌을 깨뜨리고 목마른 천리마가 내로 달리는 것 같이 힘차다”고 흠모의 말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장군 이여송 등 고위급 인사들도 앞다투어 청년의 친필을 구해 갔고, 이로써 청년의 글씨는 대내외적으로 더욱더 널리 퍼졌다.
당시 전란을 당한 조선 입장에서는 이웃 국가 명나라의 지원이 절실했다. 접반관까지 따로 두어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며 지원을 호소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청년의 글씨는 엄청난 국고와 인력을 절감할 수 있는 요소였다.
청년은 임진왜란 내내 글씨를 썼고, 자신의 문화적 역량으로 애국을 함으로써 국난극복의 한 축을 담당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어명을 받들어 천자문을 썼다. 백성이 쓸 교과서용이었다. 청년의 천자문은 처음 발간된 이후 국가에서 여러 차례 중간되며 가장 널리 공식 보급됐다.
왕실을 비롯, 백성들 사이에서도 청년의 글씨체가 널리 유행했다. 청년의 글씨체는 그렇게 계층을 막론하고 일반화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조선 글씨의 기준이 됐다.
실제 청년의 글씨는 ‘법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법이라 함은 모범이 되고 기준이 된다는 뜻이다.
과연 이게 누구냐. 이름 한호. 황해도 석봉산 아래 살았다 하여 자신의 호를 석봉으로 지은, 바로 한석봉이다.
한석봉은 생전에도 아주 잘나가는 한류 대스타였다. 사후에도 어머니와의 떡 썰기 일화가 오늘날까지 회자되며 이름을 떨치고 있다.
한류는 이미 한석봉에 의해 시작되고 있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