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볼펜으로 메모를 적으려던 당신. 그때 당신에게 누군가 다가와 볼펜을 빼앗아간다고 상상해보라.
“검은색 색소의 독점권을 내가 샀다. 나 빼고 이제 아무도 쓰지 못한다”
당신이 항의해보지만, 상대방은 “내가 내 돈 거액 들여서 사서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당신이 어쩔 테냐”는 자세로 일관한다. 이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실제 이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단 지난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난 2014년, 해외 어느 화학기업이 세계에서 가장 검은 색소인 ‘반타블랙’을 개발해 화제를 모았다.
반타블랙은 빛의 99.965%를 흡수하는 흡광률을 가진 색소인데, 기업 측은 색소가 개발되고 2016년 스프레이 형태로 사용할 수 있는 도료 제품을 만들었다.
같은 해 다소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현대 미술가 애니쉬 카푸어(Anish Kapoor)가 이 반타블랙의 독점권을 거액에 사고서는 이렇게 선언한 것이다.
“나를 제외한 사람의 사용 및 소지를 금지한다. 이미 사서 소지한 사람들이 있다면 강제로 압수하겠다. 아무에게도 반타블랙을 팔지 않고 내 예술작품만을 위해 쓰겠다”
사람들은 다 카푸어를 비난했지만, “내 돈 거액 들여서 사서 내가 마음대로 쓰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카푸어의 주장은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이때 카푸어에 대한 반발심에 불타오르던 또 다른 영국의 화가가 등장했으니, 이름은 스튜어트 셈플(Stuart Semple)이었다.
셈플은 친한 화학자와 함께 반타블랙을 대체할 수 있는 독자적인 색소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탄생한 색소가 바로 ‘블랙3.0’.
카푸어의 특허를 피해가야 했기 때문에 사실 반타블랙에 비하면 미세하게 흡광률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블랙3.0 또한 빛의 99%를 흡수했으며, 시중에 판매되는 다른 검은색 도료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검은색을 낼 수 있는 물질이었다.
해당 색소를 개발해낸 셈플은 곧장 블랙3.0 페인트를 우리나라 돈으로 약 4만원, 매우 저렴한 가격에 시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딱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모두가 이 페인트를 자유롭게 사서 쓰십시오. 단, 애니쉬 카푸어는 이 페인트를 절대로 살 수 없습니다”
바로 제품 판매 시 카푸어에게는 절대로 팔지 못한다는 조건이었다.
카푸어는 코웃음을 쳤다. 블랙3.0보다 반타블랙이 더 좋은데 왜 사겠냐는 거였다.
하지만 셈플의 물감 개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앞으로 물감 개발해서 장사할 건데, 내가 만든 물감은 전부 다 카푸어한테 팔지 않겠다”
셈플은 블랙3.0에 이어서 특이한 색소 개발을 계속해나갔다. 셈플이 개발한 신형 색소들은 모두 다 공통적인 판매 조건이 붙었다.
“애니쉬 카푸어에게만 판매 금지”
실제로 셈플은 ‘세계에서 가장 분홍색인 분홍색 색소’를 개발했다.
워낙 채도가 높아 일반 카메라로는 포착이 잘 되지 않을 정도의 분홍색인데, 당연히 이 분홍색 물감 역시 카푸어에겐 판매 금지됐다.
분노한 카푸어는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셈플의 분홍색 안료를 구한 다음, 해당 색소를 중지에 묻혀 손가락 욕을 하는 사진을 찍어 자신의 SNS에 올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에 누리꾼들은 “결국은 샀네?”라고 반응했다.
그렇다면 셈플의 반응은? 셈플은 다음에는 유리가루가 들어간 ‘세계에서 가장 반짝이는 반짝이’ 색소를 출시했다. 손에 묻히면 유리가루 때문에 다칠 수밖에 없는 색소였다.
참고로 이후 2019년 미국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가 반타블랙보다 더 검은 물질을 결국 개발해 반타블랙은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이라는 자리도 내주게 됐다.
이에 더해 현재 MIT 개발팀은 자신들이 개발한 물질을 모든 예술가들에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