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이 집어삼키는 대성당 지켜보며 시민들, 눈물·탄식·침묵
무릎 꿇고 기도하며 가톨릭 성가 함께 부르기도
프랑스 파리의 상징과도 같은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마에 휩싸인 지 두시간가량 지난 15일 오후 9시께(현지시간) 기자는 경찰이 쳐놓은 센 강변의 폴리스라인 코앞까지 다가갔다.
성당이 위치한 시테섬은 통제된 상태여서 다가갈 수 없었지만 100여m 떨어진 강변에서 불길이 치솟는 장면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화재 발생 초기에 프랑스 방송사들의 긴박한 생중계 화면에서 본 것과 같은 검은 연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성당 중심부의 첨탑은 온데간데없이 무너져내린 상태였고, 그 가운데 시뻘건 화마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사방에서 소방차들이 고압의 물줄기를 불이 난 성당 지붕 가운데 쪽으로 쏘아 올렸지만, 불길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성당 뒤쪽의 첨탑과 이를 둘러싼 비계에서 시작된 불길이 종탑에까지 번진 모습이 맨눈으로 보였고, 용접기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불꽃이 튀어 올랐다.
경찰은 이미 노트르담 대성당이 위치한 센강의 시테섬을 봉쇄한 채 시민들을 대피시킨 상태.
파리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뒤섞인 인파는 센 강변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각자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이나 영상을 찍으며 어서 불길이 잡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모습이었다. 시테섬 입구를 통제하는 경찰관들 옆을 지날 때 “어떻게 해야 하나”라며 탄식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센 강변 곳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시민들이 보였다.
20대로 보이는 한 젊은 여성은 이어폰을 꽂은 채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계속 손으로 닦아냈고, 70대 할머니는 함께 온 딸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냐”면서 소리 내 울었다.
그러나 다른 시민들과 관광객들 대부분은 할 말을 잃은 듯, 그저 멍한 표정으로 파리의 랜드마크인 이 성당을 삼키는 화염을 그저 조용히 쳐다만 볼 뿐이었다.
프랑스인들이나 외국인 관광객들 할 것 없이 모두 프랑스 가톨릭 문화유산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갑작스러운 불운에 깊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기자는 폴리스라인 앞의 무거운 침묵을 뒤로하고 대성당이 자리한 시테섬 옆의 생루이섬과 센강 좌안을 잇는 투르넬 다리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대형화재 진압용’이라고 쓰인 소방차 두 대가 기자가 나온 방향으로 추가로 배치돼 달려왔다.
투르넬 다리의 한 가운데로 가자 노트르담 대성당의 전체적인 모습이 더 잘 보였고, 그래서인지 성당을 잡아먹을 듯이 일렁이는 화염은 더 위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어디선가 가톨릭 성가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리 위에 모여있던 군중 가운데 천주교 신자로 보이는 시민들이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점점 더 많은 군중이 유장한 곡조의 이 성가를 따라불렀다.
기자는 11년 전인 2008년 2월 숭례문에 큰불이 났을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서울 한복판에서 대한민국의 영욕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봤을 국보 1호 숭례문이 속수무책으로 거대한 불길에 휩싸였을 때 많은 국민이 우리 몸의 일부가 불에 타는 듯한 느낌에 괴로워했었다.
파리 시민과 프랑스 국민에게 이 노트르담 대성당아 차지하는 의미는 한국인들이 숭례문에 대해 갖는 의미에 못지않거나 어쩌면 그 이상이다.
1163년 공사를 시작해 1345년 축성식을 연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 고딕 양식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빅토르 위고가 1831년 쓴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의 무대이기도 하다.
1804년 12월 2일에는 교황 비오 7세가 참석한 가운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관식이 열렸고,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열리는 등 중세부터 근대, 현대까지 프랑스의 역사가 말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우리의 숭례문은 화재 당시 안타깝게도 전소된 것과 달리, 노트르담 대성당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불길은 화재 발생 5시간가량이 지난 현재 큰 불길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노트르담 성당의 화재 소식에 “우리의 일부가 불탔다”고 했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오후 11시 30분께 대국민 긴급 발표를 통해 “최악은 피했다”면서 “노트르담 대성당을 재건하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