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비록 작으나 둘레가 3천리이고 인구가 2천만인데, 4천년을 이어오면서 능히 우리나라를 다스릴 훌륭한 인재들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제 와서 일본에 대신 다스려달라고 하겠습니까!”
지난 17일 서울 혜화동 성균관 명륜당에서 열린 유림독립항쟁 ‘파리 장서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 유학자가 파리 장서 해석본을 낭독하자 참석자 몇몇이 눈물을 닦았다.
파리 장서는 파리에 보내는 긴 글이라는 뜻으로 100년 전, 137명 유림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계에 호소했던 장문의 글이다.
이 글은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열강에 보내는 독립 청원서이자 3·1독립운동을 바로 알리고 민족독립 정당성을 밝히는 글이었다.
암울하고 다급했던 정세 속에서도 그들은 2,674개 글자로 학자다운 겸손함과 기개를 담았다.
“저희들은 초야에 묻혀 살아보니 국제사정을 상세하게 보고 듣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전통적으로 나라의 신하로서 훌륭한 군주의 교화에 힘입어 유교의 문하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가 새로워지는 날을 맞이하여 나라의 존폐가 이 한 번의 행동에 달렸으니, 나라 없이 사는 것은 나라가 있으면서 죽는 것만 못 할 것입니다.”
독립 청원은 전국 유림의 뜻이었다. 곽종석, 김복한 등이 서명서 작성을 주도했고, 김창숙의 연락으로 각지 유림의 서명을 받아 독립 청원서를 완성했다.
압제가 심각했던 당시에는 문서를 전달하는 것조차 위험했던 상황이었다.
김창숙은 문서로 ‘짚신’을 만들어 국경을 넘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모인 대표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상하이에 옮겨진 파리 장서는 번역을 거쳐 김규식에 의해 파리로 전해졌다.
영문본과 한문본 으로 인쇄한 4천 장은 유럽과 중국의 각 기관, 국내 주재 외교관과 향교 등에 발송됐다.
그 뜻이 하늘에 통했던 것일까. 많은 외신들이 깊은 관심을 가졌고 국내에선 제2차 유림단 독립운동, 항일의병과 무장 투쟁 등 국내외 항일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파리 장서 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유림은 500여 명에 달했다.
서명서 작성을 주도했던 곽종석, 김복한 등은 감옥에서 순국했고 그 외 많은 유림이 처형되거나 고문을 받았다.
파리장서는 나라의 운명을 위해 목숨을 건 항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