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총 쏠줄 안다, 전쟁 나면 또 달려올 것”…평생 한국 사랑한 美노병

By 이 충민

한국에 머물렀던 시간은 4개월이 채 안 되지만 평생 한국을 사랑하는 미국인이 있다. 해외 6·25 참전용사 초청 행사로 지난해 한국을 찾은 진 폴 화이트(91) 씨다.

화이트 씨는 6·25전쟁 당시 미 해병 1사단 소속 병장으로 참전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 작전에 투입돼 서울 수복에 공을 세웠으나 의정부에서 북한군에게 부상을 당하고 만다.

일본에서 치료를 받던 화이트 씨는 전우들이 그해 11월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에서 중공군에게 고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강력히 원대복귀를 요청했고 수송기를 타고 결국 다시 전쟁터로 돌아갔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을 흐르는 장진강을 댐으로 막아 생긴 호수로 1950년 11월, 이 일대에서 미 해병 1사단과 중공군 9병단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혹한에 펼쳐진 이 전투는 미 해병 사상 가장 격전으로 평가된다.

당시 미군은 열 배나 되는 12만 명 중공군의 포위를 뚫었다. 비행기로 부교를 투하해 부서진 수문교를 복구해서 건너는 필사의 작전을 펼쳤고 결국 중공군에 궤멸적 타격을 입히면서 남하를 막았다.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던 미 1해병사단 장병들이 눈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미 해병대)

당시 2500명이 넘는 미군이 전사하거나 실종됐고 중공군도 2만5천 명이 전사했다. 혈로를 뚫은 미군은 영하 40도의 흥남부두에서 군인 10만 명과 민간인 10만 명의 철수작전을 펼쳤고 이 장면은 영화 국제시장의 첫 장면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화이트 씨는 “당시 160명이던 중대원이 30명으로 줄어 있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장진호 전투에서 걸린 동상 때문에 같은 해 12월 본국으로 후송되면서 한국을 떠나게 됐다.

화이트 씨는 “매번 한국의 발전에 놀랍습니다. 이런 나라를 지키는 데 제가 기여했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6·25전쟁에서 제가 더 잘 싸웠으면 한국은 지금 통일됐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한국민에게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1950년 9월 서울 수복 후 촬영한 화이트의 모습. (폴 화이트 제공)

화이트 씨는 지금도 미국 내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 모임에서 활동 중이다. 그는 “한때 8000명이던 회원이 이제 1200명으로 줄었습니다. 주요 업무 중 하나가 회원의 장례식 참석”이라는 안타까운 사실도 전했다.

그는 지난해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가 주관하는 ‘장진호 전투영웅 추도식’에 참석해 먼저 떠난 전우들의 넋을 기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에 6·25전쟁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난다면 이번에도 달려오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총을 쏠 줄 압니다. 미 해병대가 저의 재입대를 받아들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저는 한국을 돕겠습니다.”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현충선양광장에서 열린 ‘장진호 전투영웅 추도식’에서 미군 노병 진 폴 화이트(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