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과 이혼이 만연한 이 세상에 부부의 사랑이 무엇인지 전하는 글이 있기에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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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사용하는 서른아홉살 주부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은 저의 다리가 되어주는 고마운 남편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한살때 열병으로 소아마비를 앓은 후 장애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기에 멋진 글귀로 글을 쓰지는 못합니다.
제가 남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방송을 통해서입니다. 지난 1983년 우연히 라디오의 장애인 프로그램을 통해 문밖 출입을 못하며 살고 있는 저의 사연이 나갔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던 지금의 남편이 제 이야기를 듣다가 들고 있던 펜으로 무심코 저의 주소를 적었답니다.
남편은 그 다음날 바로 저에게 편지를 했지만 저는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글을 잘 몰랐던 탓도 있었지만 남자를 사귄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남편은 답장도 없는 편지를 1년 가까이 1주일에 한번씩 계속 보내왔고, 저는 여전히 답장 한통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주소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그 먼 곳에서 서울 금호동의 저희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장애자인 제 사정상 반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먼 곳에서 저를 찾아온 사람이기에 손수 정성껏 식사 대접을 했습니다.
그렇게 저를 만나고 제주도로 돌아간 남편은 그날부터 1주일에 한통씩 보내던 편지를 거의 매일 일기처럼 적어 보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소포가 하나 왔는데 종이학 1,000마리를 접어 걷지도 못하는 저에게 1,000개의 날개를 달아 이 세상 어디든 날아다닐 수 있게 해주고 싶다며 보내온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남편의 청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결국 직장을 포기하면서 저를 보기 위해 서울로 이사를 왔고, 3년에 걸친 청혼 끝에 저는 남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85년 7월17일, 저희는 마침내 부부가 되었습니다.
내 삶의 날개가 되어주는 당신께
여보, 지금 시간이 새벽 5시30분이네요. 이 시간이면 깨어있는 사람보다 아직 따뜻한 이불 속에서 단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더욱 많을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이미 집을 나서 살을 에듯 차가운 새벽 공기에 몸을 맡기고 있겠지요. 그리고는 밤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드는 당신. 이렇게 열심히 뛰는데도 늘 힘겹기만 한 우리 생활이 당신을 많이 지치게 하고 있네요.
내가 여느 아내들처럼 건장한 여자였다면 당신의 그 힘겨운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질 수 있으련만, 평생 휠체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는 그럴 수가 없기에 너무나 안타까워 자꾸 서러워집니다. 자동차에다 건어물을 싣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쓰는 당신. 그런 당신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물 한 방울, 전기 한 등, 10원이라도 아껴쓰는 것이 전부라는 현실이 너무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불편한 나의 다리가 되어주고, 두 아이들에게는 나의 몫인 엄마의 역할까지 해야 하고, 16년 동안이나 당뇨로 병석에 누워계신 친정어머니까지 모셔야 하는 당신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데 어머니께 딸인 나보다 더 잘하는 당신이지요. 이런 당신께 자꾸 어리광이 늘어가시는 어머니를 보면 높은 연세 탓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 속이 상하고 당신에게 너무 미안해 남 모르게 가슴으로 눈물을 흘릴 때가 많답니다.
여보, 나는 가끔 깊은 밤 잠에서 깨어 지친 모습으로 깊이 잠들어 있는 당신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생각합니다. “가엾은 사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한평생 걷지 못하는 아내와 힘겹게 살아야 할까?”라구요.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서러움이 북받치지만 자고 있는 당신에게 혹 들킬까봐 꾸역꾸역 목구멍이 아프도록 서러움을 삼키곤 합니다.
비를 좋아하는 나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가끔 당신을 따라 나섰지요. 하루종일 빗속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힘든 줄도 모르게 되지요. 그런데 며칠 전 겨울비가 제법 많이 내리던 날, 거리에서 마침 그곳을 지나던 우리 부부 나이 정도의 남녀가 우산 하나를 함께 쓰고 가는 모습을 보았어요. 서로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게 하려고 우산을 자꾸 밀어내는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당신이 비를 몽땅 맞으며 물건 파는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어요. 그때 내가 느꼈던 아픔과 슬픔은 어떤 글귀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나의 가슴을 아리게 했어요. 그때 나는 다시는 비 내리는 날 당신을 따라 나서지 않겠노라 나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답니다.
그리고 여보, 지난 결혼 10주년 기념일에 당신은 결혼때 패물 한가지도 못해줬다며 당신이 오래도록 잡비를 아껴 모은 돈으로 나에게 조그마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주었지요.
그때 내가 너무도 기뻐했는데 그 반지를 얼마 못가 생활이 너무 힘들어 다시 팔아야 했을 때, 처음으로 당신이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도 가슴이 아팠어요.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신은 그때 일을 마음 아파 하는데, 그러지 말아요. 그까짓 반지 없으면 어때요. 이미 그 반지는 내 가슴 속에 영원히 퇴색되지 않게 새겨놓았으니 나는 그것으로도 충분해요.
3년 전 당신은 여덟시간에 걸쳐 신경수술을 받아야 했었지요. 그때 마취에서 깨어나는 당신에게 간호사가 휠체어에 앉아있는 나를 가리키며 누군지 알겠느냐고 물었을 때 당신은 또렷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요. “그럼요,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사랑할 사람인데요”라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에게 나는 바보처럼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한없이 눈물만 떨구었어요. 그때 간호사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이세요”라고. 그래요, 여보. 나는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예요. 건강하지는 못하지만 당신이 늘 나의 곁에 있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어린 시절 가난과 장애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기에 나는 지금 이 나이에 늘 소원했던 공부를 시작했지요. 적지않은 나이에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야학까지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와 아이들과 어머니 저녁 챙겨주고 집안청소까지 깨끗이 해놓고 또다시 학교가 끝날 시간에 맞춰 나를 데리러 와주는 당신. 난 그런 당신에 대한 고마움의 보답으로 정말 열심히 공부할 겁니다. 어린 시절 여느 아이들이 다 가는 학교가 너무도 가고 싶어 남몰래 수없이 눈물도 흘렸는데 이제서야 그 꿈을 이루었어요. 바로 당신이 나의 꿈을 이루어주었지요. 여보, 나 정말 열심히 공부해 늘 누군가의 도움만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될 거예요.
여보, 한평생 휠체어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나의 삶이지만 당신이 있기에 정말 행복합니다. 당신은 내 삶의 바로 그 천사입니다.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고 늘 감사의 두 손을 모으며 살 겁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가.
“다시 태어나면 제가 당신을 도울께요”
이 글은 지난 2002 경향신문에 실린 “‘휠체어’ 아내가 ‘행상’ 남편에 보내는 사부곡”이란 기사에서 발췌한 것이다.
당시 이 글에서 아내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던 남편 김석진씨는 왜 얼굴도 모르고 장애인이었던 아내인 임영자씨에게 구애를 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장애자와 비장애자를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까. 육체적으로 불편하다고 그게 장애자는 아닙니다. 장애자 역시 따뜻한 마음이 있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어요. 저는 아내에게 처음 편지를 쓰고 또 만났을 때도 아내가 장애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아내를 장애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내가 있어 더 행복합니다”.
당시 17년째 자신의 발이 되어준 남편에게 이 같은 애절한 사랑의 편지를 보낸 임영자씨는 울먹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보, 나의 소원이 무엇인지 모르지요? 내 소원은 높은 구두신고 당신 팔짱을 끼고 걸어보는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 많지 않아 힘겹게 살고는 있지만 부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랍니다. 다만 한가지 유일한 소망은 우리 부부가 이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 나는 건강한 사람, 당신은 조금 불편한 장애인으로 만나 다시 부부가 되는 거예요. 그때는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인가 해줄 수 있을 테니 말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