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청사에 달린 ‘생소한 문양’의 태극기, 그 속에 담긴 ‘우리 모두의 역사’

By 박 형준 인턴기자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지난 25일 외교부 청사에 설치된 ‘초대형 태극기’가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압도적인 크기, 그리고 알고 있는 것과 확연히 다른 문양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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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외교부 청사에 설치된 태극기의 괘와 태극의 문양은 현재의 것과 방향이 정반대였다. 건물을 가릴 만큼 거대한 태극기를 인쇄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일까? 외교부가 제작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대로 태극기를 설치해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날 설치된 태극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친필 서명문이 표기된 이른바 ‘김구 서명문 태극기’를 모델 삼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등록문화재 388호로 지정돼 있으며, 1941년 김구 주석이 미국으로 출국하는 미우스 오그 신부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의 손을 거쳐 조국으로 돌아온 해당 태극기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안치돼 있다.

1882년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최초의 태극기가 만들어진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태극기는 통일된 모양과 규격 없이 제각각 만들어졌다. 4괘가 아닌 8괘가 그려진 태극기도 있었고, 괘 하나를 가운데 그린 약식 태극기 또한 당시에는 존재했다.

김구 주석의 태극기도 마찬가지. 하지만 태극기는 각각 모양과 크기는 달랐어도 언제나 대한의 민중과 희노애락을 함께하며 긴 시간을 보냈다. 여러 모양의 태극기는 단 한 가지, ‘조국 독립을 향한 대한의 의지’ 그 자체를 의미했다.

해방 이후 구성된 ‘국기시정위원회’에서 태극기는 마침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지만, 통일된 모습의 태극기가 담은 의미는 오히려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

4·19혁명부터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까지 40여년의 시간 동안 태극기는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었다.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대한국민의 대표적인 이미지였다.

하지만 역대 정권 역시 같은 기간 동안 태극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국민의 애국심 고취를 유도했다. 국가적 행사에서 게재된 대형 태극기, 교실과 거리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태극기는 그들에게 ‘질서’와 ‘통합’이었다.

이렇듯 상반된 의미를 품은 태극기의 무게는 날이 갈수록 그 무거워졌으나,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태극기는 진정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것이 됐다. 붉은 악마들이 가득했던 그해 태극기는 이념의 도구로서의 무게를 던져버리고 한결 재치 있게, 가볍고 친숙한 모습으로 우리 모두의 함성 속에 스며들었다.

그랬던 태극기가 오늘날에는 다양한 의미라는 무게를 다시 짊어지게 됐다. ‘붉은 악마’들의 것이었던 태극기는 이제 소위 ‘태극기부대’의 태극기로, 혹은 그 반대 세력의 태극기로 제법 명확하게 이분화된 지 오래다. 두 집단 속에서 태극기는 오늘도 세차게 펄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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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1일은 3·1운동의 100주년이었다.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이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와 굳센 기상, 그리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동시에 바라보게 해준 가운데, 광장을 가득 채운 대한의 민중들 앞에서 여전히 태극기는 휘날리고 있었다. 그 태극기에 우리 모두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외교부 청사에 설치된 ‘김구 서명문 태극기’에는 다음과 같은 김구 주석의 육성이 담겨 있었다.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 인력, 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서 강로말세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

2019년, 김구 선생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태극기의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