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에는 일대에서 유명한 한약방이 있다.
지역에 산다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남성당한약방’이다.
이곳은 지역에서 어른으로 인정받는 김장하(79) 선생이 반세기 넘게 운영했던 곳이다.
하지만 선생의 이름을 아는 이는 드물다.
가장 관심을 모았던 시기는 그가 39살이던 1983년 진주에 세운 명신고등학교를 1991년 국가에 헌납했을 때다.
당시 가치로 100억원 달하는 기부에 미담 기사가 쏟아졌지만, 관심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모든 인터뷰를 다 거절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터뷰를 추진하다 포기했던 ‘경남도민일보’의 김주완 기자는 32년 기자 생활을 마감하며 선생을 찾아갔다.
선생 역시 2022년 5월 말 60년간 운영해온 한약방의 문을 닫으면서 은퇴하게 된 것.
김 기자는 30년 전 자신이 세운 남성문화재단마저 경상국립대에 기증한 선생의 삶을 다큐멘터리 영상에 담았다.
선생은 19세였던 1962년에 한약업사 자격을 얻었다.
1963년 고향인 경남 사천에서 한약방을 개업한 선생은 10년 뒤 진주로 이전해 50년간 운영했다.
한약방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거기서 번 돈으로 선생은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교육의 꿈이 있었던 선생은 1984년 고등학교를 설립했고, 직원 채용에 ‘친인척이나 지인을 쓰지 않고, 돈을 받고 채용하지 않고,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어느 정치인이 잘 봐달라고 한 신입 교사의 채용을 취소한 일화가 소개되기도 했다.
김장하 선생은 진주 지역 사회 다양한 단체와 활동에 기부했고, 2000년부터는 남성문화재단을 설립해 다양한 후원을 이어오고 있다.
사람들이 선생의 한약방을 동네 금고였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는 아낌없이 퍼줬다.
그런데도 진주 지역에서조차 김장하 선생을 아는 이가 드물다.
본인이 돋보이는 걸 싫어하고, 누가 본인의 칭찬이 될 질문을 하면 입을 꾹 다물어 버릴 만큼 드러나길 싫어하는 성품 때문이다.
오죽하면 대통령의 초대도 진료를 핑계로 거절했다고 한다.
대신 선생의 행적은 기부를 통해 인연을 맺은 이들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은 인터뷰 요청에 선생을 향한 존경심을 드러내며 세상 사람들에게 선생의 삶을 알려야 한다며 반겼다고 한다.
장학생들의 인터뷰를 종합하면 선생은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지원했다.
그들 중 교수나 법조인 등 세상의 잣대로 보면 성공한 이가 많다.
또 평범한 삶을 사는 이도,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어 남성당한약방까지 경찰이 찾아오게 하는 이도 있었다.
선생은 이들에게 그 어떤 요구 사항이 없었고 부담도 주지 않으며 생색도 내지 않는 참 어른이었다.
2019년, 무료 공연을 핑계로 도움을 받은 이들이 선생의 깜짝 생일잔치를 열였다.
선생이 준 장학금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문형배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이 생일잔치에서 “(받았던 돈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고 했던 선생을 회고하다 끝내 목이 메었다.
선생은 이렇게 세상을 위해 돈을 쓰는 이유로 “아픈 사람을 상대로 돈을 벌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함부로 쓸 수 없어 평생 자가용도 없이 해진 양복을 입고 다녔다.
그런 선생은 돈은 똥과 같다고 말한다. 그냥 쌓아두면 악취가 진동하지만, 밭에 골고루 뿌려 놓으면 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선생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2부작 ‘어른 김장하’는 지난해 12월 31일과 올 1월 1일 ‘MBC경남’에서 방영됐다.
이후 입소문을 타고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고, 지난 설 연휴 MBC를 통해 전국에 방송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