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오랜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타스, 스푸트니크 통신 등 러시아 매체들에 따르면 러시아 중앙 임상병원은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오랜 투병 끝에 이날 저녁 사망했다”고 밝혔다.
개혁, 개방을 외치다
1931년 3월 2일 태어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54세인 1985년 3월 일곱 번째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됐다.
이후 6년 동안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티'(개방) 정책을 밀어붙이며 소련과 국제사회에 대변혁을 몰고 왔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농장 책임자, 기업 대표자 등은 당의 지침에 따르지 않고 자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게 됐으며 1987년에는 무역의 국가 독점이 해제됐다.
암거래상들의 활동을 합법화했고 대신 세금을 내게 했다. 인위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비슷한 수준으로 맞췄던 것에서 벗어나 생산성에 따라 임금을 달리했다.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글라스노스티 정책으로 소련 국민은 생각한 바를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되찾았다.
미‧소 냉전 시대를 끝낸 주역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집권 9개월 만인 1987년 12월 레이건 당시 대통령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맺어 사거리 500~5500km의 중·단거리 핵미사일을 없애고 개발 및 배치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핵무기의 ‘제한’을 넘어서 근본적인 ‘감축’을 위한 시도였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동유럽 주둔 소련군 50만 명을 일방적 감축하는 등 군축 조치가 뒤따랐다.
이 같은 미-소의 화해 분위기는 독일 통일과 동유럽과 중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의 민주화의 촉매제가 됐다.
그는 또 1988년 5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을 철수하기 시작해 이듬해 2월까지 철군을 완료했다.
1989년 12월에는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몰타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동안 계속된 냉전의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1990년 여름 동ㆍ서독의 통일을 용인했으며 통일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으로 잔류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전임자들과 달리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 정부가 실패해도 방치하는 정책을 폈다.
그는 역사적인 핵군축 합의와 냉전 해체, 독일 통일 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또 같은 해 6월 4일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한-소 수교에 합의했다. 1904년 파기됐던 조-러수호통상조약 이후 86년 만에 다시 관계가 정상화된 것이다.
소련 군부의 쿠데타와 소련 해체
그러나 1990년 여름 급진적 경제개혁안인 ‘샤탈린의 5백일 개혁안’을 거부해 개혁파 인사들과 틈이 벌어졌다. 1991년 8월 흑해 연안의 크림반도에서 여름휴가를 즐기던 도중 쿠데타를 일으킨 KGB와 군의 강경파들에 의해 연금을 당했다.
이들의 쿠데타는 비록 ‘3일 천하’로 막을 내렸지만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소련 지도부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쿠데타 진압에 큰 역할을 했던 보리스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대신하는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1991년 12월 소련이 공식 해체를 선언하자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한 데 이어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구소련 소속 11개 공화국이 독립국가연합(CIS) 결성을 선언함으로써 소련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해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소련 대통령직을 그만뒀다.
현재까지도 러시아 국민들은 그를 ‘개혁의 실패로 소련을 해체시킨 자’라고 생각한다.
그가 퇴임한 이후 벌어진 경제적 혼란 탓이다. 실제 1993년 러시아는 개혁 부작용으로 초인플레이션과 불황에 시달렸고 1998년엔 통화의 평가절하와 은행 파산 등으로 국가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방에서는 그를 냉전의 종결자, 평화와 민주주의의 사도 등으로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가져다주던 냉전을 종식시키고, 동유럽 국가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으며, 그리고 체르노빌과 같은 환경 오염 문제를 세계에 공개하여 인류에 큰 기여를 했다는 이유에서다.
세계 각국 지도자들 애도의 메시지 보내
현재 세계 각국 지도자들은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죽음에 추모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러시아 관영 인테르팍스·타스통신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30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죽음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했다”면서 “금일 오전 그의 유족과 지인들에게 조전(弔電)를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언급한 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냉전 종식에 기여한 면을 높이 평가했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존슨 총리는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소련 사회를 개방한 고르바초프의 지칠 줄 모르는 개방정책은 우리 모두에게 모범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유엔 홈페이지에 올린 애도사에서 “세계는 한 명의 뛰어난 글로벌 지도자이자 헌신적인 다자주의자, 지칠 줄 모르는 평화 옹호자를 잃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미할 마틴 아일랜드 총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 “슬프다”며 “역사에 대한 그의 감각과 개방성, 개혁, 서방과의 교류에 대한 헌신이 세상을 바꿨다”고 적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