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환자의 치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but what can I do in the actual healing process? Absolutely nothing. It is all in God’s hands).”
지난 16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진 고(故) 주석중 서울아산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교수의 장남 주현영씨가 장례를 마치고 며칠 후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아버지의 연구실에 갔다가 뒤섞인 서류 속에서 아버지가 평소 사용하던 만년필로 직접 쓴 몇 개의 기도문을 봤다고 전했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26일 페이스북을 통해 현영 씨가 추모객들에게 전한 감사 메시지를 공개했다.
현영 씨는 “여러분께서 따뜻한 위로와 격려로 저희와 함께해 주신 덕분에 아버지 장례를 무사히 마쳤다”라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별이라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프고 비통했지만, 정말 많은 분들께서 오셔서 아버지가 평소 어떤 분이셨는지 얘기해 주시고 진심 어린 애도를 해 주셔서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라고 밝혔다.
현영 씨는 장례를 마친 뒤 유품을 정리하다 라면 스프를 발견한 사연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장례를 마치고 며칠 후 유품을 정리하러 연구실에 갔었는데, 책상 아래 박스에 버려진 라면 스프가 널려 있었다”라며 “제대로 식사할 시간을 내기도 어려워서, 아니면 그 시간조차 아까워서 연구실 건너 의국에서 생라면을 가져와 면만 부숴 드시고 스프는 그렇게 버려둔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라고 말했다.
이어 “오로지 환자 보는 일과 연구에만 전심전력을 다 하시고 당신 몸은 돌보지 않던 평소 아버지의 모습이 그대로 느껴져 너무나 가슴 아팠다”고 전했다.
현영 씨는 “아버지 빈소가 마련된 첫날 펑펑 울면서 찾아온 젊은 부부가 있었다”라며 “갑작스러운 대동맥 박리로 여러 병원을 전전하였으나 어려운 수술이라며 모두들 기피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저희 아버지께서 집도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었노라며 너무나 안타까워하시고 슬퍼하셨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위험한 수술이라도 ‘내가 저 환자를 수술하지 않으면 저 환자는 죽는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감당해야지 어떡하겠냐’고, ‘확률이나 데이터 같은 것이 무슨 대수냐’고 그러셨던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라고 전했다.
주석중 교수는 얼마 전 아내에게 “나는 지금껏 원 없이 살았다. 수많은 환자 수술해서 잘 됐고, 여러 가지 새로운 수술 방법도 좋았고, 하고 싶은 연구 하고, 쓰고 싶었던 논문 많이 썼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소명을 다한 듯하여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병원 10분 거리에 살면서 응급 수술을 도맡았던 주석중 교수는 지난 16일 오후 1시 20분쯤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패밀리타운 아파트 앞 교차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우회전하던 덤프트럭에 치여 사망했다.
1988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주석중 교수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전공의를 수료한 뒤 1998년부터 아산병원에서 근무했다.
그는 아산병원 심장병원 대동맥질환센터소장으로서 응급 수술이 잦고 업무의 강도가 극히 높아 의사 인력이 부족한 분야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왔다.
2020년부터 대동맥질환 전담팀을 꾸려 대동맥 박리를 치료해온 결과, 수술 성공률을 약 98%까지 높였다는 연구 성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노환규 전 회장은 주석중 교수에 대해 “국내 대동맥 수술의 수준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 ‘탁월하고 훌륭한’이라는 단어로 표현해낼 수 없는 인재 중의 인재”라며 “유능한 의사의 비극은 한 사람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늘의 뜻이겠지만, 인간의 마음으로는 너무나 슬픈 일”이라고 애도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