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린고비는 예부터 ‘구두쇠’, ‘지독하게 인색한 사람’, ‘지독하게 절약하는 사람’ 등의 뜻으로 부정적 이미지에 가깝다. 하지만 조선시대 대표적인 자린고비로 알려졌던 조륵[1649~1714] 선생의 행적을 알게 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최근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자린고비 선생의 반전인생을 정리해봤다.
자린고비 조륵 선생이 얼마나 구두쇠였나면, 쉬파리가 장독에 앉았다가 날아가자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깝다고 “저 장도둑놈 잡아라”하고 외치며 파리를 쫓아갈 정도였다.
무더운 여름철이 되어 어쩌다 부채를 하나 장만한 조륵은 부채가 닳을까 봐 부채를 벽에 매달아 놓고 그 앞에서 가서 머리만 흔들었다.
어느 날은 동네 사람이 어쩌나 보려고 생선 한 마리를 조륵의 집 마당으로 던졌는데 이것을 발견한 조륵이 “밥도둑 놈이 들어왔다!”하고 법석을 떨면서 냉큼 집어 문밖으로 내던졌다. 조륵은 일 년에 딱 한 번 물고기 한 마리를 사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제사상에 놓을 굴비였다. 그리하여 제사를 지내고는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숟가락 뜨고 굴비 한 번 보고, 또 밥 한 숟가락 뜨고 굴비를 보았다.
식구들이 어쩌다 두 번 이상 보면 “얘, 너무 짜다. 물 먹어라”라고 소리쳤다. 어느 날은 장모가 놀러왔다가 인절미 조금 남은 것을 싸갔는데 나중에 알고는 기어코 쫓아가 다시 빼앗아 왔다.
이렇게 일전 한 푼도 남에게 주거나 빌려주는 일이 없고, 인정도 사정도 눈물도 없이 모으고 또 모으다 보니 근동에서는 둘도 없는 큰 부자가 되었다.
이렇듯 지독한 자린고비 행색이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졌는데, 조정에서는 조륵의 이러한 행위가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판단하고는 정확한 사실 여부를 알기 위해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씨 성을 가진 암행어사가 과객 차림을 하고 조륵의 집에 가서 며칠 묵으며 사정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암행어사가 며칠 묵는 동안 보아하니, 조륵은 한양에서 소문으로 듣던 그 자린고비 조륵이 아니었다. 암행어사라고 눈치챈 것 같지는 않은데 식사 때마다 진수성찬에 술까지 대접하고 그야말로 칙사대접이 따로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서 수소문해 보니 조륵은 환갑이 되는 해부터 누구에게나 후하게 대하고, 어려운 이웃을 보면 불러다가 돈도 주고 쌀도 주는 등 아주 딴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특히 마을에 심한 흉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게 없자 조륵은 자신의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주기도 했다.
암행어사가 사정을 알고 그만 떠나려고 인사를 하자 조륵은 “아니, 이삼 일만 더 있으면 내 환갑이니 기왕이면 좀 더 쉬다가 잔치나 보고 가시오”라고 했다.
그리하여 암행어사는 못 이기는 체하며 잔칫날까지 묵게 되었는데, 그날 조륵은 잔치에 모인 사람들에게 “여러분, 그 동안 나는 나 혼자 잘 살려고 구두쇠 노릇을 한 게 아니오. 오늘 찾아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평생을 근검절약하며 재산을 모았소. 환갑날인 오늘부로 내 일은 모두 끝났소”하면서 아예 전재산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암행어사는 임금께 조륵의 이러한 선행을 자세하게 고하였고 임금 인조도 기특하게 생각하게 친히 상을 내리고 칭찬했다.
그 후 조륵에게 도움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조륵을 ‘자린고비’가 아닌 ‘자인고비(慈仁考碑)’라고 부르며 칭찬했는데 여기에서 ‘자인’은 자비롭고 인자하는 뜻이며 ‘고’자는 ‘나를 낳아준 어버이’란 뜻이라고 한다.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 사람이었던 조륵은 이후 큰 선행으로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리는 일)까지 받았다.
(참고: 음성군 디지털음성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