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 연간(1725~1777)에 활동했던 조선시대 화원(畫員: 화가) 변상벽(卞相壁)은 뛰어난 그림 솜씨는 있었지만 처음에는 명성을 얻지 못했다.
원래 산수화를 잘 그렸던 변상벽은 자신보다 산수화를 더 잘 그리는 화가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보다 더 잘 그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에 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고양이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고양이를 관찰하게 된다. 매일매일 반복해서 고양이를 관찰하고 그림으로 그리다보니, 결국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고양이의 형태뿐 아니라 고양이의 생태와 감정까지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변상벽이 얼마나 고양이를 잘 그렸던지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변고양이(卞猫)’라는 별명을 붙여 줄 정도까지 됐다.
하지만 말을 더듬는 탓에 성격이 몹시 내성적이었던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를 꺼려했으며 그림을 부탁받아도 거절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영감이 떠오르면 단숨에 그림을 그리고는 장기간 종적을 감추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솜씨가 뛰어나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조선후기 문인인 정극순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변상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변씨는 고양이 그림에 능하여 한양에서 명성을 날렸다. 그를 맞이하려는 자가 매일 백 명을 헤아렸다. 나도 이틀을 머물게 하고 그에게 고양이 그림을 얻었다.
조는 놈, 나비를 돌아보는 놈, 새끼를 데리고 장난치는 놈, 엎드려 닭을 노려보는 놈 등, 무릇 고양이가 주로 하는 일 다섯 가지를 그렸는데, 모두 그 변화를 다하고 생기발랄해 살아 움직일 것 같았다.
특히 털의 윤기를 잘 그려 까치가 보고서 울고, 개가 돌아보고 컹컹 짖었으며 쥐들은 깊이 숨어 굴에서 나오지 않았다. 정말 기예(技藝)로서 지극한 자라 하겠다.”
고양이 그림뿐만 아니라 초상화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던 변상벽은 이후 영조 39년과 49년에 영조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 제작에 참여했으며 문인 초상화도 다수 그렸다.
그는 왕의 초상화를 잘 그린 공로로 중인 출신의 화원으로 오르기 어려웠던 현감(조선시대 종6품)의 자리까지 올랐다.
변상벽은 대가로 칭송받았지만 늘 겸손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재주란 넓으면서도 조잡한 것보다는 차라리 한 가지에 정밀하여 이름을 이루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오. 나 또한 산수화를 배웠지만, 지금의 화가를 압도하여 그 위로 올라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물을 골라서 연습했지요.
고양이는 가축인지라 사람과 친근하지요. 그 굶주리고 배부른, 기뻐하고 성내는 모습들에 익숙해지니 고양이의 생리가 내 마음에 있고, 그 모습이 내 눈에 있어 그 다음에는 고양이의 형태가 내 손을 닿아 나오게 됩디다.
인간 세상에 있는 고양이도 수천 마리겠지만, 내 마음과 손에 있는 놈 또한 헤아릴 수 없지요. 이것이 내가 일세에 독보적인 존재가 된 까닭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