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길이 의례용 배 모형·’당주’명 묵서 목간도 출토
고환경 자료인 식물 63종 씨앗·멧돼지뼈·곰뼈 나와
신라 천년 왕성인 경주 월성(月城·사적 제16호) 해자에서 1천600년 전 무렵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방패 2점이 나왔다.
고대 방패는 실물이 거의 남지 않았는데, 월성 출토품은 제작 시기가 이르고 형태가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온전하다는 점에서 이목을 끌 전망이다.
2014년 12월부터 월성을 조사 중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일 발굴 현장에서 간담회를 열어 성벽에서 제물로 묻은 인골이 발견돼 화제를 모은 월성 서쪽 A지구와 이에 동쪽으로 인접한 B지구 북쪽 1호 수혈해자 최하층에서 찾은 목제 방패 2점을 공개했다.
방패 제작 시기는 모두 340년부터 410년대 사이로 분석됐다. 5세기 방패는 경북 경산 임당동에서 출토된 적이 있으나, 월성 유물이 더 완전한 형태를 갖췄다.
방패 중 한 점에는 손잡이가 달렸는데, 연구소는 손잡이가 있는 고대 방패가 발견되기는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이 방패 크기는 가로 14.4㎝·세로 73㎝이고, 두께는 1㎝다. 손잡이 없는 방패는 이보다 조금 더 커서 가로 26.3㎝·세로 95.9㎝·두께 1.2㎝다.
재질은 잣나무류이며, 손잡이는 느티나무로 파악됐다. 방패 겉면에는 날카로운 도구로 동심원과 띠 같은 기하학적 무늬를 새기고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칠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손잡이 없는 방패의 경우 원래 폭은 조금 더 넓고, 길이는 비슷했을 것”이라며 “향후 발간할 보고서에서 복원한 방패 모습을 제시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고대 방패는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에 나오는데, 손잡이가 없는 방패는 의장용일 가능성도 있다”면서 방패에 그린 그림은 벽사가 목적이라는 견해가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손잡이가 있는 방패는 일부가 깨져서 작게 보이지만, 두 방패는 크기가 거의 같았을 것”이라며 “방패를 보면 같은 간격으로 뚫은 미세한 구멍이 있는데,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끈 같은 줄로 엮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일본에서는 고대 방패가 다수 출토됐는데, 실로 엮기 위한 구멍과 기하학적 문양이 월성 방패와 비슷하다”며 “방패가 한일 문화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월성 수혈해자 최하층에서는 나무 방패와 제작 시기가 거의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제 배 모형도 출토됐다.
의례용으로 보이는 이 배 모형은 길이가 약 40㎝다. 국내에서 확인된 동종 유물 중에서 가장 오래됐고, 실제 배처럼 선수와 선미를 정교하게 표현했다. 배는 단순한 통나무배에서 복잡한 구조선(構造船)으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인 준구조선 형태로, 불에 그슬리거나 탄 흔적이 확인됐다.
재질은 약 5년생 잣나무류이며, 제작 시기는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초반 사이로 나타났다. 실제 목선 중에는 이보다 제작 시기가 이른 유물들이 있지만, 조각으로 발견돼 완전한 형태를 유추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 소장은 “배 가운데에 불을 놓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등불을 올린 뒤 물 위에 띄운 듯하다”며 “어떤 형태의 의례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신라 왕실을 위한 의례용 유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카누처럼 길쭉한 배 모형의 폭과 길이 비율이 1:9로, 실제 배 형태와 흡사하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광주 신창동 유적이나 부여 쌍북리 유적에서 나온 고대 목제 배 그릇은 폭과 길이 비율이 1:3이며, 배 모양 토기는 장식적 요소가 매우 강한 편이다.
배 모형은 일본에서 500여 점이 나왔고 관련 연구도 활발한데, 월성 배 모형과 비슷한 유물로는 시즈오카현 야마노하나 유적에서 출토한 5세기 유물이 있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이 배 모형은 길이가 54.8㎝다.
이전에 526년 혹은 586년으로 짐작되는 ‘병오년'(丙午年) 묵서 목간이 나온 월성 해자에서는 이번에도 신라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목간들이 발견됐다.
그중 하나는 삼면에 글자를 적었는데, 국보 ‘단양 신라 적성비’에 등장하는 지방관 명칭인 당주(幢主)를 명기한 첫 번째 목간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내용은 당주가 음력 1월 17일 곡물과 관련된 사건을 보고하거나 들은 것으로, ‘벼 세 석, 조 한 석, 피 세 석, 콩 여덟 석'(稻參石粟壹石稗參石大豆捌石)이라는 곡물과 수량을 기록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벼, 조, 피, 콩이라는 순서는 곡물 중요도를 반영한 것으로 보이고, 숫자는 변형을 막기 위해 원래 글자보다 획 수가 많고 복잡한 ‘갖은자’를 사용했다”면서 “신라가 통일 이전부터 갖은자를 썼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어 “월성 축조를 위해 지방에서 노동력을 동원했다는 점도 더욱 명확해졌다”고 덧붙였다.
연구소는 조사를 통해 월성 해자 본래 모습과 신라인 식생활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도 확보했다.
월성 해자는 반달 형태인 월성 북쪽에 길게 띠 형태로 조성했는데, 4∼7세기에 사용한 구덩이 같은 수혈해자에서 통일 이후 돌을 쌓아 만든 정교한 석축(石築)해자로 변경됐다.
수혈해자는 흙이 유실되지 않도록 북쪽 벽에 나무기둥과 판재를 이용해 목제 구조물을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기둥은 1.5m 간격으로 박았고, 그 사이를 채운 판재 174개가 출토됐다.
연구소는 고운체를 사용해 신라 씨앗과 열매 63종과 생후 6개월 안팎의 어린 멧돼지 뼈 26개체, 곰 뼈 15점도 찾았다.
이외에도 2∼3세기 분묘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 수정 원석이 나왔고, 1호 해자 북동쪽 3호 해자에서는 석축해자 축조 혹은 의례 과정에서 한꺼번에 폐기한 것으로 짐작되는 철부(鐵斧·쇠도끼) 36점이 발견됐다.
이 소장은 “경주 남산이 유명한 수정 산지로, 월성 주변에 공방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철부는 사용한 흔적이 있는데, 분포 지역이 고르다는 점에서 건축이나 토목 관련 행사를 한 뒤 버린 듯하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