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5일)는 제77주기 광복절이다.
대한민국이 1945년 광복을 맞고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절을 맞아 독립 운동가의 숭고한 희생과 정신을 마음에 새기며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가슴 먹먹해지는 명언들을 소개한다.
백범(白凡)김구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지휘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했다.
광복 후에는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암살당했다.
김구 선생은 독립 전이나 후나 한결같은 나라 사랑으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됐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오직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고 물으시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셔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내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내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에 이를 수 없다. 사실 나를 넘어서야 이곳을 떠나고 나를 이겨내야 그곳에 이른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이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가 강력이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는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우는 등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던 중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체포됐다.
이후 그는 1910년 3월 26일 중국 여순(뤼순)감옥에서 30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1910년 3월 유언.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 사형 당일일본 헌병 치바 도시치 간수에게 써준 휘호. 이후 대한민국 국군의 슬로건이 된다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갔지만 수감된 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오 하나님,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는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렸던 쇼와 덴노의 탄생 기념행사에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시 육군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에 불과했다.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함은 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폐(强國疲弊)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말로 조선은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 조락의 시기가 꼭 온다는 것은 역사의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로 삼는다.
-의거 후 일인 경찰의 취조 도중 밝힌 거사 이유-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학자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의 유언. 이 유서는 후에 보물 568-2호로 지정되었다-
우당 이회영
이회영 선생은 조선 말 10대 부자 안에 들던 집안의 6형제 중 넷째이다.
여섯형제와 일가족 전체가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서전서숙’ ‘신민회’ ‘헤이그 특사’ ‘신흥무관학교’ ‘고종의 국외망명’ ‘의열단’ 등 국외 항일운동의 전반에 관여하였다.
“생과 사는 다 같이 인생의 일면인데 사를 두려워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려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 있는가.”
이 외에도 수많은 독립 운동가가 나라를 위해 희생했고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는 명언들을 남겼다.